Wednesday, January 23, 2013

알버커키와 한경직목사



알버커키에 있는 프레스비테리언병원의 설립100주년을 기념하는
“The First 100 Years Presbyterian” 이란 책에 발표된 환자 한경직의 사진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목사님으로 존경받아 온 서울에 영락교회를 세우셨던 한경직목사는 한국사회에 너무도 잘알려진 목사님이지만 그가 1930년경 그의 미국 유학 시절에 뉴멕시코주 알버커키에서 2년간 계섰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듯 하다. 그의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것이 이곳 알버커키에 서 페결핵환자로 프레스비테리언 요양원에서 투병하고계신 동안이였는데 그분이 여기 계셨던 사적자료를 찾을수가 없어서 아쉬웠으나 최근 프레스비테리언병원의 설립100주년을 기념하는 “The First 100 Years Presbyterian” 이란 책을 편찬한 Mos Palmer여사를 만나게 되어 몇가지 자료를 얻을수 있었고 UNM 대학 도서관 자료를 통해서도 몇가지자료를 입수했다. 1930년경의 알버커키 상황과 이곳에 한국인으로는 아마도 최초로 왔을것으로 보이는 한경직목사의 그때 상황을 최근 입수한 자료에 근거해서 소개하려고 한다.

페결핵의 어제와 오늘

한경직 목사가 젊은 시절 미국유학와서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1929년 그가 이곳 알버커키로 오게 된것은 폐결핵이란 병때문이였다. 그분의 얘기를 하기전에 그당시의 결핵은 얼마나 무서운 병이였는지를 언급하고 들어가는게 좋을듯 하다. 결핵은 1943년 항생제 Streptomycin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난치의 병이였다. 오페라 “춘희(La Traviata)”에 나오는 비올레타가 폐결핵환자로, 풋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에 나오는 ‘그대의 찬손’을 부르는 미미가 역시 폐결핵 환자였다. 우리가 아는 역사속의 유명했던 많은사람들이 결핵의 희생으로 세상을 일찍 떠났었다. 몇사람만 예로 들면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폴 고갱, 폴란드의 피아노 작곡가 쇼팽, 이태리 바요린 연주가 파가니니, 프랑스의 종교개혁가이며 장로교의 기초를 세운 칼빈(장 칼뱅), 독일의 시인 쉴러가 다 결핵의 희생자였다. 감리교의 초석이 된 죤 웨슬리도 51세에 폐결핵에 걸려 투병생활을 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 엘레노어여사도 폐결핵의희생자였다.

페결핵과 알버커키

1900년 초에 알버커키(앨버커키로도 표기되지만 현지에서는 알버커키(Albuquerque)로 쓰임) 도시가 급성장했었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미국의 동부지역에서 이주해온 폐결핵 환자와 그 가족때문이였다. 이곳 고지대의 건조하고 맑은 공기, 맑은날씨에 밝은 햇빛이 페결핵 치료에 아주 좋다고 알려지면서 동부지역으로 부터 환자와 그 가족들이 이곳으로 많이이주해왔다. 도시 인구가1900년에는6,238명이였는데 1910년에 거의 두배로는 11,020명, 그 뒤 20년뒤 1930년의 도시인구는 26,570명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결핵 요양원이 많이 생겨 날수 밖에 없었고 요양원이 많아지니까 더 많은 환자들이 이주하는 가속적인 현상이 일어난것이다. St. Joseph 요양원이 1903년 처음 생겼고 1908년 Southwestern Presbyterian 요양원(Sanatorium) 이 세워졌다. 이 요양원은 지금의 프레스비테리언 병원(Presbyterian Hospital)의 전신이 되며 한경직목사를 치료해준 요양원이다. 1912년에는 Methodist Deaconess 요양원이 새워졌고 그후 수많은 요양원이 Central 길가에 세워져서 Central Avenue를 가르켜 “Lungers’ Avenue” (Lunger는 폐결핵 환자를 일컫는 slang) 또는 “결핵의 길(Tuberculosis Row)”이라고도 불렀다.


사진1 Central 길옆에 세워진 프레스비테리언 요앙소(1921년경 사진으로 추정함) 현제의 Presbyterian Hospital의 북쪽이 된다. (사진제공:courtesy of forgottenabq.blogspot.com)

프레스비테리언 요양원의 설립

Presbyterian Hospital의 전신인 Southwestern Presbyterian Sanatorium이 설립된것은 폐결핵에 걸려 오하이오에서 알버커키로 이사와서 요양생활하다가 완쾌되고 나서는 이곳 제일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를 담임하게된 Dr. Cooper 목사에 의해서 였다. Cooper목사는 1902년 아내 Delia와 6살,11살된 두 아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낯선 이곳으로 내려온 이유는 오직 한가지, 난치의 병 폐결핵에서 살아나는것이였다. 그와 그의 아내는 열심으로 기도하면서 치유의 은사를 기원했었다. 그들의 기도가 응답받아 2년뒤에 쿠퍼목사는 완쾌되었고 제일장로교회를 담임하게되었다. 교회도 갑자기 성장하는 축복을 받아 오래된 작은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크게 지어 1906년에 봉헌했다. 그의 열정은 교회성장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병고침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끝이지 않고 행동으로 보답하기 위해 이곳에 몰려오는 가난한 결핵환자들을 돕는일에 앞장서야 된다고 결심했다. 그는 교단을 통해 요양원 설립을 역설하였고 그의 안이 곧 채택되고 드디어 이곳에 먼저 세워진 St. Joseph요양원에 이어 두번쩨가 되는 프레스비테리언 요양원을 1908년 설립하게 되었다. 요양원은 환자를 받을때 환자의 종교나 재정상황으로 차별하지 않았던것은 특기할 사항이다. 그런 까닭에 요양원의 재정은 어려움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쿠퍼목사님은 열정적으로 교단을 통해서 또는 동부지역 순회강연을 통해서 선교자금조달을 호소하고 재정문제를 해결해나갔다. 교회담임을 사임하고 요양원일에만 전념하게된것은 1927년이였다. 그는 요양원 운영에만 만족하지 않고 결핵 퇴치를 위한 부설 의학연구소의 설립까지 추진했다. 세탁기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Maytag회사 사장 Frederick L. Maytag은 쿠퍼목사를 도와 Maytag Research Laboratory를 요양원 옆 Oak Street에 1931년에 짓게 되었다. 이 건물은 그 당시에 지은 건물로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두개의 건물중 하나가 되었다. 요양원은 그당시 미국의 경제공황속에서 어려움을 잘이겨내고 종합병원으로 발전해나갔다. 100주년을 넘긴 오늘의 Presbyterian병원은 뉴멕시코주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발전되어 PHP보험 가입자 439,000명의 건강을 지켜주는 기관이 되었다.

사진2 Central 길옆 오늘의 프레스비테리언 병원모습. 100년사 책의 표지.
(Courtesy of “1908-2008 The First 100 Years Presbyterian” By Mo Palmer and Bill Beck)

유학생 한경직의 투병

영문판으로 발행된 한경직목사님의 전기책 “Just Three More Years To Live!”와 우리말로 된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란 책에 의하면 한경직목사는 숭실대학을 졸업한후 방위량(Blair)선교사의 격려와 윤치호선생의 도움으로 미국유학을 오게되었다. 1925년 그의 나이 24세때 처자를 두고 부산항을 떠나 요꼬하마로 가는 배를 타면서 미국유학의 길이시작되었다. 산프란시스코에 도착한뒤 켄사스로 와서 엠포리아 대학에서 학사과정으로 들어간후 일년뒤 졸업하고 뉴져지주에 있는 프린스톤 신학교 석사과정으로 들어갔고1929년 석사를 마치고 곧 예일대학으로 가서 박사과정으로 진학하려고 했었다. 그의 뜻대로 되었다면 그보다4년 앞서서 프린스톤을 졸업하고 예일에가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해서 연세전문학교의 교수가 된 백낙준박사와 같은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사실 한경직은 그때까지도 목사가 되겠다는 꿈은 없었고 교회역사를 가르치는 신학교수가 되려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그 꿈이 깨어지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가게되는 계기가 된것이 그의 폐결핵이었다. 유학생활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조달을 하노라고 밤낮 없이 과로했던 탓으로인지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미시간주에 있는 요양원에가서 치료를 받고저 했으나 결핵 3기의 환자를 그곳에서는 치료하기 어려우니 뉴멕시코주 알버커키에 있는 남서부프레스비테리언 요앙원(Southwest Presbyterian Sanatorium)에 가서 치료받는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이곳  쿠퍼 박사(Dr. Cooper)원장에게 소개를 해주었고 또 프린스톤 신학교 학장도 추천의 편지를 원장에게 보냈었다. 요양원의 쿠퍼목사는 목회자 환자를 위한 방 하나를 비워 유학생 한경직을 받아주어서 1929년 알버커키 최초의 한국인으로 그는 기차를 타고 내려와 센트랄 길가에 있는 요양원에 무료환자로 입원한것이다. 그 당시 미국내의 일반적인 요양원환자의 통계를 보면 폐결핵환자의 50%는 요양원에 입원해도 살아서 나오질 못했다고 하니 한경직은 절망에 가까운 심정으로 고향에 께신 아버지와 아내, 딸에게 유서로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아래 자신의 야망과 명예를 추구해온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서원기도를 했다고 한다. “3년만 더 살수 있게 해주시면 고국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진 빗을 갚고 죽겠읍니다.”란 서원기도를 한것이다. 기적이였다. 미시간 주 Battle Creek Sanatorium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환자가 이곳에 와서는 치유의 기적적인 은혜를 체험 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치유가 의사의 기대한 만큼 빠른것은 아니였던것 같다. 1930년 요양원에서 발행한 뉴스레터 “The Sanatorium Quarterly (September,1930)”에서 이런 토막글을 발견할수 있었다. 이 글은 요양원에 입원중인 환자 네사람을 도와달라는 호소문이였는데 그중 하나가 한경직 환자를 얘기하고 있다. 원문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Here is a young man, a Korean, a graduate of Princeton Seminary, planning to return to his people as a missionary. He had been a patient in our Ministers Cottage but his term expired and there was a long waiting list for places in the Cottage. His doctors want him to stay on another six months. He is a consecrated young man, highly thought of by all and a splendid influence.
그가 환자로 있으면서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을주는 젊은 신앙인이였음이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의사의 진단은 6개월의 연장으로 회복될것으로 보았으나 실제로는 1년정도 더 체재해서 1931년 퇴원을 했고 추가로 6개월의 요양을 콜로라도 덴버에 가서 보낸후 1932년 귀국한것을 보면 회복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한목사의 자서전에 보면 이곳 요양원에 계셨던분 중 특별히 감사해야 될분으로 두분의 이름이 나온다. 한 분은 그를 입원시켜준 원장 Dr. Cooper목사였고 또 한분은 친절했던 간호원 Mrs.Marion Van Devanter이다. 이번 사료를 제공해주신 Mo Palmer여사를 통해 알게된것은 Mrs. Devanter는 간호사가 아니고 원장의 비서이면서 사무직으로 봉사했던 분이였음을 알게되었다. Mrs. Van으로 널리 알려진 이 여인은 폐결핵 환자였던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왔으나 남편이 투병에서 이기지못해 남편과 사별했으나 그뒤에도 이곳에 남아 평생을 요양원을 돕고, 특히 환자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일을 70여년간 해온 여인으로 잘알려져 있다. 주일엔 교회성가대에서 봉사했고 주중에는 요양원의 일반 사무직 외에도 환자의 식탁에 짧은 성경구절을 쪽지에 적어 올리기도하고 환자의 정신적 위로와 격려를 주는일에 크게 노력했다고 전한다.
사진 3. (왼쪽)요양원 환자로 있을때의 한경직. (중앙)요양원 원장 Dr. Cooper목사. (바른쪽)요양원 원장실의 비서이면서 사무직을 맡았던Mrs. Van.
(Courtesy of Mo Palmer’s ‘The First 100 Years Presbyterian’)

환자 유학생 한경직은 폐결핵에서 완쾌되어 1932년 귀국하여 평양으로 가서 숭인상업하교 교목이 되었다가 신의주 제2교회로 가서 목회자의 길을 걷게되었고 해방후 월남해서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교회를 세우시고 27년간 시무하셨다. 대광중고등학교를 세웠고 숭실대학을 재건했고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초교파적으로 하는일을 성공시켰고 홀트 양자회, 세계선명회, 영락모자원등 그분이 한국사회와 종교계에 기여한 사실을 너무나 많았다. 그 많은 업적의 결과로 나타난것 하나가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템플턴상을 독일 베를린에서 수상받은 것 일게다. 한목사 이전에 이상을 수상받은 사람으로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1982), 테레사수녀(Mother Teresa:1973)가 포함된다. 3년만 더 살수있게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던 한경직목사님은 2000년 4월19일 98세의 일기로 소천하셨다.

요양원의 ”The Sanatorium Quarterly”에서 또 한가지자료를 Mo Palmer여사가 발견했는데 1953년3월호 뉴스레터 기사인데 재목을”Our Kyeng Chik Han and Billy Grahm” 으로 달아놓고 쓴 글인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원문도 옮겨본다.

“장로교인의 생활(Presbyterian Life)” 이란 잡지의 최근호에 발표된 뉴스에 의하면 우리 요양원의 환자로 있었던 한경직 (그가 이곳 있을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분이 빌리그레이엄 목사의 한국 집회를 도와 통역을 하게된다고 합니다. 두분에게 모두 이번 한국 집회는 스릴이 넘치는 일이될것으로 믿습니다. (이하 생략)
We are delighted to see in a recent issue of that our former patient (whoes days with us are still very bright in our hearts) was the interpreter for Billy Graham on his recent visit to Korea. We know that this was a thrill for both of them, and we rejoice that Mr. Han, together with many other Koreans, had fellowship with this man of God. We know it was a time of inspiration for all.

사진 4. 한경직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책자의 표지

오늘의 알버커키와 우리들

한경직목사의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것이 그가 가장 약하고 절망에 빠져 있을때 였고 그것이 다른곳이 아닌 알버커키 프레스비테리언 요양원에서 일어난 사실을 확인했다. 사도 바울이 말한바 와도 같이 그가 가장 약할때 그는 강해져서 건강만 찾은게 아니고 평생 동안의 어려운 목회 생활을 할수있게한 힘을 알버커키요양원 병석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것 이였다. 그분이 다녀간지 80년이 된 오늘 이곳 도시는 인구가 그때에 비교 할때 30배가 넘는 도시로 변했다. 그당시엔 한국인은 그분 혼자였으나 이제이곳에 사는 한인이 천명이 넘고 한인교회도 여럿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수십년 동안 이도시에 잠시 살다가 간 한인들도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이곳 알버커키에서 과연 한경직목사만큼의 은혜를 체험하고 인생의 큰 전환의 계기로 삼은 한국인은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게 된다. 오늘 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80년전에 한인 유학생 한경직에게 축복의 기적이 이곳에서 일어난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축복이 내리길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2010년 새해를 마지 하자고 권하고 싶다. 끌으로 프레스비테리언  요양원 자료를 제공해주신 Mo Palmer 여사와 한목사님의 관련자료를 영락교회에서 입수해서 제공해주신 최성원집사님께 감사한다. 영락교회를 섬기다 오신 최성원집사님은University of New Mexico 약학대학에서 폐결핵에 관련되는 연구를 하고 계신 박사님 이시다.
오늘날의 프레스비테리언 병원

글:이경화 장로(알버커키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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