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의 한국 근대화 작업에 있어서는 서독의 지원에 힘입은바가 크다. 1961년12월 서독의
수도 본에서 한국정부와 독일 연방정부간에 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의정서가 서명되었는데 이 의정서에 보면 여러 가지 지원 계획 중 하나로 한국의 기술자 60명을
독일에 초청해서 독일내의 기업체에 배치하여 기술 습득을 하도록 하는 기술원조 계획이 들어 있었다. 이 계획에 의해서 1962년 여름 경제기획원에서 독일 파견 훈련생을 모집했고 나는 이 프로그램에 지원한 결과 선발이 되어 독일로 가게 되었다.
파독 광부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1년 전의 일이다. 독일 정부에서 여비와 생활비 일체를 제공해 주면서 기술 연수를 시켜 주었으므로 나에게는 너무나 감사한 기회였다.
사진
1: 바이힝겐 마을에 있는 칼텐슈타인 성.
이곳은 YMCA와 유사한 유겐드돌프가 자리잡고 있다.
62년 가을에 우리 기술훈련생 60명은 김포 공항에서
KNA 소속의 DC-4항공기를 타고 동경까지 갔다. 동경 하네다 공항에서는 독일 정부에서 제공한 루프트한자(Lufthanzsa)의 보잉 707 전세 비행기로 갈아타고 알라스카를 경유 북극을 넘어 독일의 쾰른 까지 날라
갔다. 백설로 덥힌 알라스카의 멕킨리산과
어름의 북극과 그린랜드를 지나 대서양을 거처 독일 상공에 들어서자 풍요한 독일 땅이 눈에 들어 왔다.내려
보면서 한국의 상공에서 내려 본 헐벗은 산과 땅의 경치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라고 생각했다. 쾰른에서 우리 기술
훈련생은 여러 대의 버스로 분승해서 독일어 교육을 받기 위해 정해진 곳으로 가게 되었다. 내가 포함된 일행은 화학공학과 전자공학계통의 엔지니어들
이었는데 우리를 실은 버스는 아우토반(Autobahn)을 타고 남쪽
230마일 정도 거리에 있는 스투트가르트(Stuttgart)를 향해 달렸다. 말로만 들어온 독일의 아우토반! 생전 처음 보는 고속도로였다. 히틀러 당시에 이미 주요 도로를 완성시켜 놓은 독일의 산업 동맥인
아우토반은 전후의 잿더미 위에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켜 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진 2: 바이힝겐에서 민박을 하고 있을 때 주인집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우리가 배치 된 곳은 스투트가르트시에서 서북쪽 엔즈 강가에 있는 바이힝겐(Vaihingen)이란 인구
5천명 정도 되는 마을이었다. 이곳에는 칼텐슈타인(Kaltenstein)
이라고 부르는 옛 성(城)이 있는데 독일 기독교
청년들을 위한 교육을 담당하는 유겐드돌프(Jugenddorf)가 그 성의 건물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YMCA와 비슷한 기관이었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2개월간 독일어를 교육받고 나서 각각 기업체로 배치되도록 예정 된 것이다. 두 달 동안 이곳에서 독일어 교육을 받는 동안 이곳 주민들이
우리들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두 달 동안의 독일어 교육을 마치게 될 날이 가까워 왔을 때 우리
일행은 주민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무엇인가 하고 떠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의논 한 결과 결론을 음악회로 내렸다.
'유겐드돌프의 저녁' 이란 이름으로 주민들을 칼텐슈타인성으로 초대하기로 하고 한국
소개도 포함하는 음악회를 준비했다. 한복을 가지고 온 친구가 있어서 한복 차림으로 한국 역사도 소개하게하고
음악 프로그램으로는 남성중창과 독창에 기타와 하모니카의 이중주 등을
가지고 음악회를 준비했다. 한국에서
우리는 슈베르트의 가곡이나 독일 민요를 몇 개 부르는 것을 보통 있는 일로 대견하게 보지를 않았지만 독일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의 노래를 부른다는데 신기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저 멀고도 먼 곳에 있는 코리아라는 나라사람들이 어찌 우리나라
독일 노래를 배웠을까? 하고 신기하게 생각 하는 것 같았다. 음악회는
강당이 찰 정도로 많은 손님이 와 주어서 성대히 마쳤다. 음악회가 있은 다음날 독일 친구가 어제 저녁 지방신문에
음악회에 대한 기사가 개재되었다고 신문을 보여 주었다. 인구 5천명의 작은 마을 사람을 위해서 신문이 발행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신문 기사를 보니 우리가 그날 저녁 칼텐슈타인 성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훌륭한 사절단 역할을 했고 합창 노래 순서와 기타와
하모니카의 이중주등 모든 연주에 대해서 좋은 평을 해주었다. 전자과 동기인 한영열 친구의 기타와 내 하모니카와의
이중주는 마르티니 작곡의 사랑의 기쁨(Plaisir D'armour)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모니카 솔로로는 아리랑과 양산도를 불었던것으로 기억한다.
사진 3: 바이힝겐 안 대어 엔즈(Vaihingen
an der Enz) 지방신문에 난 기사와 사진.
한국 소개하는 음악회를 열어 주민들에게
감사를 표했었다.
음악회를 마친 며칠 후 우리는 어학연수를 마치고 각각 전공에 맞는 기업체로 배치되었다. 전자계통의 나의 친구들은 모두
베를린에 있는 지멘스회사로 배치되어 가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까지 버스로 이동한 후에 판아메리카 항공기로
동독 안에 갇힌 섬과 같은 분단의 도시 서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지멘스(Siemens
AEG)전기회사에 배속 받아 전기 기능공이 배우는 기초부터 실습을 통해 훈련을 받기 시작 했다. 지멘스회사에서 기술 훈련을 받는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는 12층 건물이었는데 각 층 마다 휴게실과
공동 전화가 한 대씩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회사에서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휴게실에서
TV를 보며 쉬고 있는데 나를 찾는 전화가 베를린 방송국에서 왔다. 방송국 직원은
나에 대한 얘기를 방송국내의 친구에게서 듣고 지멘스 회사에 수소문해서 내 기숙사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연락을 하게 된 경위를 말하더니 용건은 방송국에
와서 하모니카로 노래 한 두곡을 불어 줄 수 없겠느냐고 질문을 했다.
알고 보니 바이힝겐에 있을때 우리가 주최했던 한국 소개 음악회 행사 때 베를린 방송국 직원 한사람이 우연히
자기 고향 바이힝겐에 잠시 들렸는데 그때 한국의 밤 행사에 그의 친척들과 함께 와서 우리의 음악과 내 하모니카를 들었던 것이다. 이 직원이 방송국의 "젊은이의 시간"이란 공개방송 프로그램 편성 담당자에게 나를 초청 해보라고 추천을 한 것 이었다. 독일의 두메산골 엔즈 강가의 (아니 강이 라기 보다 개천에 가까웠는데) 바이힝겐 마을에서 하모니카 불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베를린에 와서 독일의 전국 방송을 타게 되었으니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 아니냐
하면서 친구들도 나와 함께 약속된 방송 시간에 방송국으로 갔다. 방송국의 커다란 홀에는 대학생 방청객이 차
있었는데 의자만 있는 게 아니고 중앙에는 춤을 출수도 있는 넒은 공간이 되어 있어 노래에 맞추어 춤을 자유롭게 추기도 하는 공개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어나운서는 간단한 인터뷰를 나와 몇 마디 나누고 말하길 독일의
젊은이들을 위해서 한국의 젊은이가 불러주는 한국 민요 "천안삼거리"를 들어 보십시오, 라고 말했고 나는 하모니카로 이 노래를 불었다. 앙콜이 들어와서 두 번쩨 곡으로 라 파로마(La Paloma) 스페인 민요를 불었다. 이 생 방송이 끝나고 나서 사례로 50 마르크를 받았는데 이 돈으로 늘 갖고 싶어 했던 독일제 호너 제품인 크로매틱 하모니카를 구입했다. 존 세바스챤의 음악회에서 받은 감명을 되살려서 그가 보여준 연주법을 개발 해보려고 결심을 한 것이다. 악보 상점에 가서 모차르트의 오보에 4중주 악보를 삿다. 이 곡도 세바스챤의 레퍼토리의 하나였던 곡이다. 오보에 파트를 하모니카 연습곡으로 택해서 매일 저녁마다 한
시간 이상 연습을 했다.
여기서 베를린 도시의 역사적 배경을 조금 얘기 하고 다음 얘기로 넘어가려 한다. 베를린은 2차 대전 때 참전한 4개국이 분담 관활 해왔는데 1948년 소련은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국의 관할권을 포기하게
하려고 베를린과 서독을 잇는 철도와 도로를 차단하는 베를린 봉쇄를 감행했었다. 연합군은 베를린 시민을 살리기 위해 모든 식량과 연료 등의
물자를 비행기로 공수해서 베를린 봉쇄를 버텨냈다. 베를린 템플호프 공항에 군 수송기는 꼬리를 물고 착륙과
이륙이 주야로 계속되었고 가장 높은 기록으로는 하루에 1500회 이상의 항공 수송으로 5천 톤의 물자를 실어 날랐다. 스타린의 베를린 봉쇄에 대항한 강력한 연합국 측의 도움은 베를린
시민에게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고 그 어려운 공수 작전의 주 역할은 해 낸 미국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1963년 6월 서 베를린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 베를린 시민의 환영은 대단했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케네디에게 있어서는 그의
일생에서 최고의 뜨거운 환영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케네디 대통령이 연설하게 되어 있는 광장으로 나갔다. 그는 환영하는 군중 앞에서 유명한 연설
"나는 베를린 시민 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고 말한 연설을 직접 듣게 되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베를린 장벽을 세워 도시를 동서로 분단시킨
소련을 비판하면서 아래와 같은 연설을 했었다. 2000년 전에는 가장 자랑스러웠던 말이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일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베를린 봉쇄를 견뎌내고 공산주의의 압박에도 자유를 지켜낸 베를린 시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격려의 뜻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진 4: 서 베를린을 방문한 케네디 대통령이 환영하는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출처: en.wikipedia.org)
그 뒤 약
5개월이 지난 11월 겨울 철 이었다. 베를린의
어느 음악회당에서 하모니카 합주단의 공연이 있다는 광고를 신문에서 보게 되었다. 베를린에서의 음악회는 보통
미리 표를 사두지 않으면 매진되어 못 들어가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에 미리 표를 사두었다가 공연 당일 11월22일 음악회에 갔다. 한국에서 하모니카 합주단원으로 오래 있었던 나에게는 처음으로 대하게 되는
독일의 하모니카 합주단에 대한 호기심이 꽉 찰 수밖에 없었다.
독일 사람들이 시간 지키는데 있어서는 놀랄 만큼 철저했는데 그날 저녁 음악회에서 무대의 막은
10여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사회 보는 사람이 무대 중앙으로 뚜벅 뚜벅 걸어 나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말하기 시작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희들의 하모니카 합주 음악회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용서 하여 주십시오. 저희들은 이 자리에서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관중들은 웅성거리는 듯 했으나 곧 이어지는
말이 나오자 조용해 젓다. "연주를 못하게 된 이유는 방금
비보를 받았기 때문 입니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피살 되었다는 비보를 받았습니다. 이 시간을 기해서
베를린 시내에서 연주 되는 모든 음악회는 중단 되고 있다는 소식도 받고 저희들도 이에 동감하면서 오늘 음악회 연주를 취소하겠습니다.
입장권을 환불 못해드려서 죄송 합니다 만은 여러분께서도 우리와 같은 마음일 것으로 믿습니다".
케네디가 피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독일어로 Oh! My God! 소리 지르는 목소리들이 터 젔으나 곧 물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많은 관중은 넋을 잃은 듯 좌석을 한동안 떠날 줄을 몰랐다. 음악회 표 값을 되돌려
달라는 말을 하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며칠 뒤 미국에서 케네디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다.
베를린 시 정부는 시민들에게 케네디를 보내는 마지막 조의 표시로 저녁 7시부터 한
시간 동안 촛불을 키자는 제안을 했다. 저녁 7시가 되자 온 시민이
전깃불을 끄고 촛불을 키는 일에 참여했다. 도시는 순간에 암흑의 도시로 변했으나 아파트 마다 집집의 유리창에
세워 놓은 촛불은 너무도 인상 깊게 보였다. 저녁 8시 까지 한 시간 동안 베를린 시민은 촛불을 켜서 케네디의 마지막 길을 전송했다.
귀국을 한 달쯤 앞에 두고 있을 때 뮌헨에서 훈련 받고 있는 동료들로 부터 연락이 왔다. 뮌헨을 구경시켜 줄 터 이니 휴가 받아 나오라는 전화였다. 선배와 함께 기차를 타고 네시간 정도 걸려서 뮌헨이란 도시로 가서 친구들과 만나 이삼일 좋은 시간을 갖었다. 헤어지기 전날 저녁 친구들은 뮌헨에 온 사람은 꼭 한번 들려야 할 곳이 있다고 어느 맥주홀로 데리고 갔다. 천명의 좌석이 있는 어마 어마하게 큰 호프브레우하우스 라는 곳이었다. 옛날 히틀러가 나치활동을 시작한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홀 안 중안에는 무대가 있었고 남부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전통 복장을 한 단원 열명 정도로 구성된 밴드가 경쾌한 독일 음악을 신나게 연주 하고 있었다. 악단을 지휘하던 지휘자가 음악을 잠시 멈추고는 우리 일행 여덟명이 둘러앉은 둥근 테이블로 닥아 왔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하며 인사말을 던지더니 나를 보고 무대에 올라와서 지휘를 해보지 않겠느냐 라고 물었다. 바이힝겐에서 함께 한국소개의 음악회를 준비했던 나의 친구들은 지휘를 사양하고 있는 나를 뒤에서 밀고 지휘자는 나를 앞에서 잡아끌고 해서 할 수 없이 무대로 향했다. 무대로 가면서 지휘자에게 내가 무슨 곡을 지휘해야 되는거냐고 물었더니 독일 사람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진 알테카메라덴(Alte Kameraden)이라는 행진곡이라고 했다. 이곡은 한국에서 내가 속해있던 고려하모니카 합주단 악보의 제1번으로서 가장 많이 연주했던 곡 중의 하나였다. 나는 지휘자에게 이 곡이라면 나도 잘 아는 노래라서 잘 되었다고 말하고 그가 씨워 주는 깃 달린 독일사람 모자를 쓰고 지휘봉을 잡았다. 건성으로 지휘봉만 흔드는 게 아니라 곡의 각 파트를 아는 것처럼 지휘를 하는 것 같아 보였는지 많은 박수를 손님들이 보냈고 지휘자는 마이크를 잡고 말하길 "여기 멋지게 지휘를 한 한국의 이 젊은이를 위해서 모두 건배 합시다"라고 큰 소리로 외처서 맥주 매상 올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천 명의 손님이 일제히 잔을 다 같이 들 때 오르는 매상은 상당 했을 것이다. 약 한 달 뒤에는 독일 기술훈련을 마치고 귀국해서 한국에 와 있었는데 국제 우편물이 하나 서울 답십리 우리 집으로 날아 왔다. 깃이 달린 독일 모자를 쓰고 호프브레우하우스에서 지휘하는 내 모습이 찍힌 사진이 온 것 이었다. 인사말로 주소 남겨 놓고 가라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사진을 찍어 먼 한국에 있는 나에게 국제우편으로 사진을 보내주는 독일 사람의 철저함에 고마움을 느꼈다.
한국에 와서는 독일에서 사온 크로매틱 하모니카는 긴 동민 상태에 들어갔다. 독일에서 열심히 연습했던 하모니카는
나의 바쁜 직장 생활 때문에 잊어지고 있었다. 독일에서 배운 근면한 정신과 이론 보다는 실제 기술을 중요시하는 독일 기술자 정신을 가지고 전기 통신 기술원 훈련소라는
UN의 원조로 세워진 체신부 소속 기관에서 무선 통신 강의를 맡은 전임강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5년 뒤 1969년
뒤 늦게 미국유학을 나올 때 까지 내 하모니카는 긴 잠을 자야 했다.
(다음호에는 '미국에서의
나의 하모니카'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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