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29, 2013

산 넘어 저곳 먼 하늘 아래


(부 제목: 알버커키와 산디아산)

옛날 나의 어린시절에 어린이 잡지에서 읽은 한편이 기억난다. 독일의 시인 부세(Karl Busse) ,  Über den Bergen(Over the mountains) 나의 아버님께서 넘어 저곳이란 제목으로 번역하신것 이였는데 나의 기억이 틀릴수도 있겠으나 기억 는데로 써보면 아래와 같다.

넘어 저곳 하늘 아래
행복이 있다는 남들의 얘기
친구따라 나도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 왔네
넘어 저곳 하늘 아래
행복이 있다는 남들의 얘기


 
남들처럼 나도 행복을 추구했었다. 산넘어 저곳 하늘 아래에는 여기보다는 좋은 기회가 있고 행복해 질수 있는 조건들이 많을 것으로 믿어 왔었다.  우리 가정이 살기에 좋은 환경이 있고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도 좋은 학교들이 있고, 좋은 직장에 좋은 대우를 해주는 회사들도 많은 곳이 넘어 저곳이라고 믿었다. 그리 생각했기 때문에 십여년 동안 정들었던 알버커키를 등지고 뉴저지주로 이사를 갔었다.  산디아 넘어 하늘 아래로 간것이였다. 그곳은 뉴욕시 옆에 있는 뉴저지주. 이곳 뉴멕시코와는 아주 다른 환경이였다. 푸른 잔디와 아름다운 꽃과 나무로 덮힌 전원 풍경이 어디나 펼처진 지역이였다. 내가 일하게된 회사도  세계적으로 알려진 연구소여서 이상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일년반이 지난 어느날 우리 가족은 저녁식탁에서 뉴멕시코로 돌아가자는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리고 그자리에서 이곳에 있는 회사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내려와 달라는 제안을 받아 드리겠다고 했고 며칠뒤 새로 마련했던 집도 팔고 알버커키로 돌아 오고 만것이다. 칼부세의 시에서 말한  눈물짓고 온것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가족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 오게되었다.  까닭은 행복이 넘어에 있는것이 아니라 아래 이곳에도 있음을 알게되었기 때문이였다.  사실 행복은 외부의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게 아니다.  자신의 마음의 태도 또는 상태에 따라 주어지는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외부의 조건에서 행복의 필요조건을 찾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필요조건들을 생각해 볼지라도 이고장은 넘어 저곳보다 못할게 하나도 없다는것을 알게되었다. 나는 지면을 통해서 내가 알게된 사실을 소개하려한다.

나는 이곳 알버커키가 특히 한국인에게 축복의 땅으로 알게 되었다. 뉴저지에 있는동안 아이가 대학으로 진학할때가 되어서 어느 대학으로 진학해야될까를 생각하면서 지역에 있는 여러 명문 대학교를 방문해보았다.  프린스톤대학도 그중 하나였다.  그곳 프린스톤 신학대학에서 공부하고 한국 유학생중에는 한경직목사님이 계셨음을 그때 알게되었다.  1929 프린스톤  신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예일대학의 박사과정으로 들어가려든 그분은 폐결핵에 걸려 죽음직전에 몰리게 되었는데 의사의 권고로 그는 페결핵 요양으로 이름난  알버커키에 있는 Southwest Presbyterian Sanatorium, 지금의Presbyterian병원의 전신인 요양소에 와서 치료를 받으며 요양원의 목사관에서 2년간 거주하셨다고 한다. 투병하는 동안  기도하시길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신다면 조국을 위해 목회와 봉사의 길을 택할것을 약속하였는데 과연 그분은 병상에서 일어나시게 되었고 완쾌되자 예일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하려든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께 약속한 그대로  귀국 하셔서 1931 평양숭인상업 학교 교목이 되셨고 후에 신의주 2교회에서 목회의 출발을 하셨다.  해방후 서울로 월남하셔서 장로교회인 영락교회를 세우셨고  교회를 섬기시면서 지구상에 500여개의 교회를 세우는 선교 사역을 이루셨다. 그의 공헌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한경직목사님은 1992년세계적 종교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과학계의 노벨상과도 같은, 템플턴상을 수상하셨다. 알버커키는 유학생의 생명이 육체적, 정신적 양면에서 모두 구원받고 한국을 위해 크나큰 일을 하게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던곳임을 알게 되었던것이다. 한경직 목사가 만일 페결핵에 걸리지 않았고 예일대학에 가서 신학박사가 되었다면 오늘 우리가 존경하는 훌륭한 목사님의 수준에 올라갈수 있었을까? 하는 가상적 질문을 해보면 아마도 답은 아니라는게 맞지않나 싶다.  사람은 시련을 통해서 강해지고 시련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할때 능력을 받게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한경직 목사님이 한국의 사회와 기독교계에 역활을 하시게된 바탕은 프린스톤 대학에서 배운 지식에 있는게 아니라 알버커키에 있는 요양원에서 사경을 해매면서 하나님과 기도로 씨름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같은 은혜의 체험기간이 참된 바탕이 되었을것으로 믿는다. 한경직 목사님의 입장에서는 이곳 알버커키는 야곱이 천사의 축복을 받으려고 밤세워가면 고투끝에 축복을 받아낸 브니엘이란 곳과도 같고 아니면 돌베개 배고 자든 야곱이 꿈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베델이란곳과도 같은 의미가 있을것으로 생각해볼수 있다.

알버커키로 돌아오는 차속에서 나는 한경직목사가 축복받은 땅으로 내가 가고 있는것은 나의 의지로만 가고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주고 계시기 때문인것으로 생각 하게되었다.  뉴저지주로 이사가기전에는 일년에 세번쯤 나가든 교회를 뉴저지에 가있는 동안 후배친구의 극진한 권유로 매주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세례까지 받게되었고 그후 한달도 않되어 알버커키로 돌아오게 된것은 내가 계획했던것과는 전혀 무관했기때문이다.
 
나는 미국내에 여러 도시마다 생겨나는 한인회나 한국교회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었다. 한국인들간에 싸움많은곳이 한인회요 한인교회라고 들리는 부정적인 소식에 동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고장이 축복의 땅이라고 믿어지고 나서부터는 나도 생각이 바뀌어서 나도 무엇이든지 지역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겼다.  주머니에 가방하나 들고와서 UNM대학원에 입학해서 수업료도 내지못하는나에게 수업료 면제에 생활비 까지 주어서 가족까지 데려다가 굶지않고 살게하면서 6년간 공부할수있게 해준 대학과 뉴멕시코 주정부에 신세를 갚아야겠다는생각도 들었다.  어느날 꽃을 사러 Osuna Nursery 갔다.  Nursery 주인되시는 안장환씨를 만났다.  그분 말씀이 이곳에 오는손님들 하고 얘기 해보면 한국이 어디붙어 있는지 모르는사람이 많아요. 월남이나  인도네시아 사이에 있는나라로 생각하는분도 있더군요하고는 한국을 소개하는일에 우리가 좀나서야겠어요!”라고 하시면서 다운타운에서 매년열리는 Summerfest행사에 Korean Night 날잡아 참가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셨다. 나도 제안에 동감하여 시청에 찾아가서 Summerfest담당자를 만나보았더니 7,8월중 어느 토요일저녁을 한국의 밤으로 날잡아서 할수있다고했는데 주최자 이름을 어디로 해야겠느냐고 물어 왔다.  개인의 이름은 않되고 단체이름 이여야 된다고 했다.  한인회가 조직이 되어야겠구나하는 생각에 부닥치고 말았다. 그런일이 있은지 얼마않되어 로스앤젤레스 총영사님이 오셔서 풍자브로더씨의 식당에서 이십여명의 지역의 유지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자리에서 한국의 밤에 대한 프로그램 구상을 얘기했더니 모두가 우선 한인회를 창립시키자고해서 한인화창립준비위원장이 되어서 한인회에 가장 부정적인 생각가진 나는 한인회를 만드는일을 맡았고 1982 44 뉴멕시코한인회 창립회로 교민들이모여 한인회가 탄생되었고 나는 한국의밤 행사에 한인회주최로 다운타운 프라자에서 Korean Night행사를 치룰수 있게되었고 행사는 수년동안 한인회의 주요사업으로 이어져 내려왔었다.  한인사회의 규모가 작았던 당시 모든 인력은 대학의 유학생과 한인교회와 카톨릭교인의 도움과 비지니스를 하시는 교민과 한인유지들의 지원으로 된것이였다.  그후 내가 한인회를 책임맡은 기간중 LA에서 폭동사건이 터진일이있다. 그때 폭동의 원인중하나가 한인들이 지역사회에 비지니스에 성공은 하고 있으나 지역사회를 되돌려 주는것이 없는것도 이유중 하나라는 기사를 읽고는 무언가 우리가 땀흘려 이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한국인이되어 후손들도 배우게해야겠다는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구체화한것이 몇가지되는데 그중 하나는 Adapt-Highway였다.  I-25 하이웨이의 2마일 구간,  San Antonio  Tramway사이의 하이웨이 양쪽 주변 결국  4마일지역이 되는 구간에 버려진 쓰레기를 집어서 청소하는일이였는데 40여명의 회원들이 나와서 세시간에 걸려서 일을 마치곤 했다.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담아 놓아두면 하이웨이 department에서 걷어갔는데 세시간에 걸처모은 쓰레기가 150봉지에 달할때도 있었다.  그때에 협력해주신 여러 교회 교인여러분, 유학생, 골프회 비지니스하시는분들 모두 고마운분들이였음을 잊지않고 있다.

그때가 어제 같은데 어느듯 70고개도 넘고  이곳에 사는 토백이가 되고 말았다.    지난 40년간의 이곳 생활을 회고해보면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이곳에 와서 공부한 한국유학생이나 여기 사는 교포들이나 모두 이곳에서 많은 축복을 받은것같다.  이곳 UNM대학에서 공부하고 귀국을 했던 타주로 가서 살든지 모두 훌륭한 사회적 인물이 되어서 소식을 주고 받을때 또는 이곳을 방문하면서 모교의 스승을 찾아뵙는분을 볼때 이런생각을 해본다.  이곳의 한인교회가 서로 화목하면서 성장해 온것도 축복이고 더욱 이작은 도시에서 한인회가 착실하게 성장되어 온것도 축복이다. 한인회관을 마련한것도 축복이고 훌륭한 교사선생님들이 한국의 글과 문화를 가르치는 한국학교를 이끌어나가고 한인회장이란 고역을 감당하는 봉사자가 이어 온것도 축복으로 알고있다. 축복을 의식치 않고 불평할때도 있었지만 찬양대 지휘자가 나와서 내가  쉴수 있는 축복은 안주시나하고 욕심을 내기도 한다. 이제 이만 하면 지면이 찰듯하니 이만 줄이고 다시 하모니카를 잡고 녹음을 계속해야겠다 YouTube 올릴 하모니카연주로 컴퓨터를 이용 One-man Quartet녹음을 며칠쩨 하고 있다. 하이든의 천지창조중 한곡이다. 음악을 즐기면서 뉴멕시코의 하늘밑에서 축복의 고장에서 산디아산을 보며 리오그란데 강건너 펼처지는 노을을 보며 모든것에 감사하며 오늘을 산다.

 

 

 

 

3 comments:

  1. 이번에 뉴저지에서 뉴멕시코로 편입을 하게된 학생이에요. 재정적으로 힘들어서 귀국을 결정하게되었는데, 어느날 에서 졸업할때까지 매년 학비 3/4를 도와준다 하여서 가게되었어요 ㅎㅎ 살면서 저한테 제일 뿌듯햇고 부모님께 감사인사와 함께 하나님께도 기도 올렸습니다. 이제 다음주 월요일이면 오리엔테이션도 참석하고 많이 바쁠것 같네요. 건강하시구, 자주 여기 들리겠습니다.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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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학교는 UNM 이에요 ㅎㅎ 전공은 현재 경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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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댓글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늦었지만 UNM으로 오신것을 축하합니다. 이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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