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12월 23일 우리교회에서 주최한 성탄 음악회는 지역 주민을 위한, 지역 주민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히 시도해본 음악회 였었다. 많은 알버커키 지역 교민이 참여해 주셨고 프로그램을 준비한 여러 그룹이 열심으로 준비해주셔서 프로그램을 준비한 여러분이나 청중들 모두가 보람되고 좋은 시간을 가지게 된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중에 하나인 남성 중창을 준비하시던 집사님이 내 하모니카를 중창에 포함시키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셔서 나는 노래부르는 대신 하모니카를 크리스마스 메들리중에 함께 불렀었다. 며칠후 녹음된 음악회 실황을 인터넷 유튜브(YouTube)에 올리면서 생각을 해보니 내 하모니카와 나의 교회 생활이 거의 함께해 왔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여러 사람앞에서 처음 하모니카를 불었던 곳도 교회였는데 마지막으로 불었던 곳도 교회로구나… 하는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탄음악회 동영상 링크:
최근에 올린 하모니카 솔로(실버 벨) 링크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된것은 한국전쟁 기간중 대구에서 피난민 생활 하고 있을때 야전 천막으로 세워진 교회에서였다.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 지금의 DMZ선까지 밀고 올라 갔지만 전선은 전진도 후퇴도 없는 교착상태에 빠저 있었다. 서울서 피난 내려 온 사람들은 서울에 돌아가도 잿더미가 된 서울에서 먹고 살 길이 막연할 뿐만 아니라 전쟁도 끝난것이 아니여서 그때 시작되고 있던 휴전회담의 귀추를 기다리며 서울로 돌아 가는것을 미루고 피난민 생활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가족은 원래 경기도 안산 근방에서 피난생활 하다가 대구에서 아동잡지 “소년세계” 를 출간하는 일을 아버지께서 맡게 되어 우리 가족은 대구로 내려가서 약 1년동안 피난민 생활을 하게 되었다. 대구에는 서울 피난민 학생을 위한 대구 연합 중고등학교가 세워저 있었다. 교실은 야전천막 만한 크기의 판자집을 교실별로 여러채 지어서 쓰고 있었다. 비가 오면 여기 저기서 비가 새는데 다가 유리 창도 없이 뻥 뚤린 창에 책상도 없는 교실이였다. 의자와 칠판만 있을뿐, 창고 같은 교실이었다. 그런데 교실 하나는 음악시간 전용으로 배정되어 있었고 그 교실에는 고물 피아노가 있었다. 음악시간에는 피아노가 있는 이 교실로 이동해서 노래를 배웠다. 어느날 음악시간이 되어 그 교실로 갔는데 음악 선생님이 새로 편입된 학생 아이를 데리고 들어 오셔서 소개를 하면서 이 학생은 피아노를 잘 치는 학생이니 이 학생의 연주를 들으면서 음악 감상시간으로 한시간을 보내자고 하셨다. 그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어머니께서는 나를 데리고 식품을 사기위해 대구 시장으로 가셨다. 대구 시내에 있는시장 까지 걸어 가는동안 나는 어머니께 음악시간에 들은 피아노연주에서 감동받은 얘기를 했다. 시장에서 이것 저것쌀과 반찬거리를 사고 나서 가라지 세일 물건같은 여러가지 물품을 팔고 있는 노점상을 지나게 되었다. 여러가지 물건중에 야마하 C장조 하모니카를 진열해 놓고 파는 노점상이 있었다. 하모니카를 보신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시고 하모니카를 급히 손에 잡고는 이거 얼마예요? 하고 물어봄과 거의 동시에 하모니카를 입에 대고 본인이 작사한 “오빠생각” 노래를 불어 재치시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우리 어머니가 하모니카를 부실줄 아는지를 몰랐었다. 결혼전에 하모니카를 자주 불으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시길 ‘우리는 가난해서 너를 피아노 공부같은것 시킬수 없는 처지니 너는이 하모니카나 배워 보거라’ 하시면서 하모니카를 손에 쥐워 주셨다. 집에 와서는 어머니를 하모니카 선생으로 모시고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달도 안되어서 그 당시 한국 최고의 하모니카 연주자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모니카 독주자 이덕남 선생
이 사건은 나의 하모니카와의 관계에서 아주 소중한 기회이기도 한데 이런 기회를 갖게된 배경에는 아버지의 영향도 있다고 볼수있다. 아버지께서는 그가 편집하셨던 ‘소년세계’ 잡지에 부족한 지면을 채우느라고 토막 과학기사 같은것을 입수해서 올리기도 하셨는데 한번은 면도날과 옷핀으로 만든 라디오 수신기 제작 기사를 잡지에 내셨다. 이차대전 당시 일본에 잡혀온 미군포로가 수용소에서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듣기위해 면도날과 옷핀으로 고안해서 수신기를 만들어 미국방송을 들은 일이 있는데 이것이 나중에 알려진것을 기사로 올린것이었다. 이 기사는 라디오가 없는 나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대구시내에 있는 시장에 가서 군수품 노점상에서 헤드폰 리시버를 하나 사가지고 와서 기사에서 읽은대로 만들어 보니 대구방송국에서 나오는 KBS방송이 모기소리 만하지만 들을수가 있었다. 안테나를 높히 치고 수신 채널의 선택도를 올리려고 코일과 가변 콘덴서를 부치고 다이오드 현상이 일어나는 면도칼과 옷핀 바늘 접촉 부분을 연필심이 좋다고 해서 연필심을 바늘 끝에 실로 감아부치는등의 Redesign을 거듭 해서 일종의 광석 수신기인 옷핀 라디오는 소리도 들을만 하게 크게 들렸고 바테리도 필요없는 무전력 수신기는 우리집에 유일한 엔터테인먼드 가전품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어린이시간 방송을 듣는데 유창한 하모니카 연주가 대구방송국에서 보내는 전파를 타고 와서 내 옷핀 라디오 리시버를 웅장하게 울렸다. 비제 작곡의 오페라 ‘칼멘’의 전주곡이였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해야 할 이 전주곡을 하모니카 독주로 멋지게 불어대는데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연주가 끝나면서 광고가 이어젔다. 연주자 이덕남 선생께서 하모니카 강습회를 대구 모 중학교에서 내주 부터 시작한다는 광고였다. 어머니로 부터 배운 하모니카 연주법에는 이미 한계를 느꼈던 나에게 이 소식은 절호의 찬스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강습회 등록비가 문제였다. 하모니카 하나 얻은것도 큰 빚을 진 기분인데 강습회비를 댈만한 형편이 아닌 피난민 생활에 말도 꺼낼수 없는 지경이었다. 할수 없이 친구를 꼬셨다. 그때 내 하모니카 부는것을 보고 함께 하모니카 동호인이 된 김태욱이란 친구가 있었다. 같은 피난민이긴 하지만 그의 부친께서는 고급장교 군인이셔서인지 경제적 여유가 조금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 친구를 꼬셨다. ‘우리 같이 하모니카를 배우러 가자! 강습료를 좀 꾸어 다구! 천천히 갚을께!’ 이 세마디로 문제가 다 해결되어 한달 동안 하모니카 강습을 친구와 함께 잘 받아서 기본적인 연주 주법을 다 배울수 있었다. (이때 알게 된 김태욱 하모니카 친구는 지금까지도 우정이 이어저 한국 방문때 마다 꼭 만나야 될 친구로 남아있다. 이덕남 하모니카 선생의 제자가 된 인연으로 몇년뒤에는 그분의 하모니카 독주곡 모음 악보집을 출판하는 일도 도와 드린일이 있다. 손으로 악보를 배껴 써서 원고를 편집해 드렸었다. )
대구 남쪽 지역 대명동에 방 한칸에 세 들어서 살았던 우리 집 남쪽에는 영산못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고 뚝을 지나서는 산이 시작 되었는데 그 지역에는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많이 짓고 사는 달 동네를 형성하고 있었다. 어느 젊은 전도사님으로 기억되는데 이분이 미군 부대를 드나들면서 야전 천막 하나를 얻어오셔서 연못가 언덕위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세웠다. 피난민을 위한 천막교회! 여기에 나는 어머님과 함께 발을 딛은것이다. 나 혼자의 의지가 아닌 반 이상 어머니의 의지와 기도에 의하긴 했으나 중3때 여러가지 영적으로 방황하기 쉬웠던 피난살이의 어려운 시절에 이 천막교회를 통해서 나의 신앙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해에 성탄절 교회 행사였던것 같다. 주일학교에서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의 여 동생이 마침 무용을 하게 되었는데 음악이 문제였다.
오르간 한대가 있기는 했으나 템포가 빠른 무용이 필요로하는 노래를 칠수 있는 반주자도 없었고 바테리로 동작하는 녹음기라도 있으면 좋았지만 피난민이 모인교회에 녹음기 가진 사람이 있을리가 없는 가난했던 교회였다. 내 동생에게 무용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여선생님은 역시 피난나온 신앙이 좋은 가정의 학생으로 판자집 동네에 살고 있었고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성경과 음악, 무용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내 여동생이 솔로 무용을 하게 되었으니 오빠되는 내가 하모니카로 “붉은 날개(Red Wing)”라는 노래를 불어주어야 되겠다는 요청을 해 왔다. 마침 하모니카 강습회에서 배운 노래 중에 하나가 그 노래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부를수가 있었다.
리허살을 한주일 동안 매일 한시간씩 하면서 동생에게도 체면 세우려고 열심히 했지만 미모의 이 여선생에게도 잘 보일려고 열심히 하모니카를 연습해 가지고 불었었다. 천막교회에서 있었던 주일학교 발표회에서 초등학교 학생이였던 내 여동생은 노래에 마추어 멋지게 발레 춤을 추었고 나는 하모니카 배운지 6개월만에 여러 사람앞에서 하모니카 연주자로 첫 데뷰(?)를 한셈이되었다. 그후로는 천막교회 전도사님의 요청으로 이따금씩 예배시간에도 찬송가를 부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53년 휴전이 되었고 우리 가족은 11월 서울로 왔으나 집을 잃은 우리는 다시 셋방살이의 연속이였다. 용산중학교 2학년때 6.25가 터졌으니 3년5개월만에 복학을 한셈이 된다. 학교 건물은 미군이 쓰고 있어서 학교내 빈터에 새로 지은 판자집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고등학교1학년 2학기였다. 그때 KBS방송을 통해서 또 한번 더 하모니카 연주를 듣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독주가 아닌 하모니카 합주였다. 고려하모니카 합주단의 오펜바하작곡의 “천국과 지옥” 서곡 연주가 방송되었다. 합주가 끝나면서 합주단원 양성을 위한 강습회가YMCA에서 열린다고 광고를 했다. 하모니카로 합주를 할수도 있다는것을 처음 알게되었고 오케스트라나 할수 있는 곡을 하모니카로 연주한 이 방송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개강 날짜에 종로2가에 있는YMCA를 찾아 갔다. 옛날 3층 벽돌 건물이였던 YMCA건물은 불타 버려서 잿더미가 되었었다. 건물 가장자리 벽은 부분적으로 남아 울타리처럼 서 있었고 부서진 벽돌들을 정리해서 공터를 만든 자리에 판자집 사무실과 교실 한두개가 지어저 있었다. 약30명의 수강생이 등록을 했고 첫 강의 시간에는 성인들로 구성된 고려하모니카 합주단이 신입 수강생을 환영하는뜻으로 합주 연주를 시범으로 들려주었다. 합주단을 이끌어가시는 최영진 선생께서 강의를 맡아 해주셨다. 가르치는 곡은 오늘날 쓰즈키(Suzuki) 바요린 기초과정에서 거처가는
Menuet, Waltz 같은 쉬운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강습회 1기 졸업생이 된 나는 곧 합주단에 가입이 되었고 바리톤 하모니카라는 중음에 해당되는 파트를 맞게 되었다. 남산에 있는 KBS 중앙방송국과 종로에 있었던
CBS 기독교 방송국의 어린이시간을 통해 하모니카 연주를 내 보내는 방송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고려 하모니카 합주단의 활동으로는 방송국 출연 뿐만 아니라 전방부대 장병을 위한 위문 공연도 여러번 했었고 서울 시내의 여러 중고등학교를 방문 연주하여 학교내의 합주단 조직을 독려하는 활동도 수없이 많이했다. 연주때 마다 학교 공부를 빼 먹는 일은 다반사였다. 용산 고등학교 뒷쪽 철조망 울타리의 개구멍 뚤린곳은 내가 학교공부를 빼먹을 수 있게 해준 내가 애용했던 좋은 비밀 통로였다.
사진설명:
고려하모니카 합주단 기념사진 (1954, 레코드음반 녹음을 위해 부산에 내려 간 기간 중에 찍은 사진). 단원은 모두 대학생이거나 성인. 빡빡 머리 고교생은 필자 한사람이었다.(앞에서 두번쩨,바른쪽에서 두번쩨가 필자. 앞줄 서있는 분은 이정식 단장, 그 다음이 최영진선생) (자료출처:대한하모니카 협회 홈페지 www.harmonica.or.kr)
YMCA에서의 하모니카 강습으로 인해서 많은 합주단 학생 단원이 생겼고 합주단원이 된 후에는 합주단으로서의 리허살이 계속 되었는데 마땅한 연습 장소가 없다보니 지도하시는 최영진 선생님 댁에서 모이는수 밖에 없었다. 신당동에 있었던 선생님댁에 10여명의 학생 단원이 좁은 방에 웅크리고 바닥에 앉아 연습을 하면 사모님은 학생들 뒷바라지 하시느라고 부엌을 드나 드셨던게 기억난다. 평양에서 하모니카 활동을 하시다가 8.15해방된후 내려 오신 최영진 선생은 교회에서는 장로님이 기시도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학생 들은 데리고 하모니카 케롤링을 하기도 했다. 그분이 다니시는 신당동 지역에 사는 교인 가정을 방문하며 대문앞에서 크리스마스 케롤 노래를 하모니카로 부르면 대부분의 교인들은 우리를 집안에 불러드려서 뜨거운 차를 대접하기도 하고 미국의 할로윈때 다과를 주듯이 우리에게 다과를 주는 집도 있었다. 단원중의 한 친구는 아예 큼직한 벼게커버를 들고 다니며 다과를 모아 한보따리 지고 다니는 일을 전담 하기도 했다. 밤 기온이 너무 추워서 입김이 들어간 하모니카가 얼어버리면 소리를 낼수 없게 되어 하모니카가 얼지 않도록 품속에 넣고 눈길을 걸어야 했던 추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합주단의 가장 큰 발표회는 내가 공대 3학년 재학때1958년3월 시공관에서 있었던 제1회 하모니카 음악 발표회였다. 슈벨트의 ‘미완성 교향곡’, 베르디의 ‘바그다드의 추장’ 서곡, 비제의 ‘칼멘’ 서곡이 일부순서에서 연주 되었는데 발표 장소인 시공관은 그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연주회당이였다. 지금의 명동 예술극장이다. 이때 나는 독주자이셨던 이덕남 선생과 함께 제일하모니카 파트에서 연주했다. 지휘는 역시 평양에서 부터 하모니카 합주단 활동을 해 오셨던 이정식 선생이었고 연주회를 가질수 있게 지원해 주신분은 그때 체신부 차관이셨던 조응천 공학박사였다. 조 박사님은 8.15전에 평양에서도 하모니카 활동을 하셨었고 서울에서 차관으로 계시면서 초대 대한 하모니카 협회 회장이 되셨다.
합주단 단원으로 있는동안 나의 고등학교와 대학생활 속에서의 내 하모니카는 늘 나의 동반자가 되어서 하모니카를 부는 장소도 다양하였다. 서울 공대는 경기도 고양군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이 기차통학을 했다. 기차 속에서 친구들의 요청에 따라 하모니카를 분적도 수 없이 많았다. 삼각산, 불암산같은곳에 친구들과 등산을 하면 하모니카는 필수품이었다. 휴전선 근방에 있는 어느 천막 교회에 가서 한 .미 군인과 지역 한인교인을 위해 찬송가도 두어번 불었다. 학보병으로 군에 입대 하면서 내 하모니카도 함께 입대했다. 논산훈련소 연병장에서 300명의 장병앞에서 휴식 시간에 칼멘 오페라의 전주곡을 불기도 했고 부산 조병창에서 군 복무시에는 부산 방송국이 부대안에 와서 개최한 노래 자랑 실황 중계중 특별 연주로 하모니카 독주를 하여 방송을 타기도 했다.
1958년 시공관에서 제 1회 하모니카발표회 연주. 앞줄 오른쪽 끝: 최영진 선생. 앞줄 왼쪽끝: 이덕남선생. 그다음이 필자. (자료출처:대한하모니카 협회 홈페지 www.harmonica.or.kr)
하모니카음악발표회 포스터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1961년에 대한하모니카협회에서는 세계적인 하모니카 연주자의 한사람인 존 세바스챤(John Sebastian Sr.)이란 분을 초청하여 독주회를 공보처 후원으로 가졌는데 이 연주회를 통해서 하모니카음악의 새로운 면을 접하게 되었다. 피아노 반주로 연주하는 그의 레퍼토리 중에서 에네스쿠의 ‘루마니아의 광시곡 제1번’은 가장 큰 감명을 내게 주었다. 이분의 방한 기간중 또 하나의 사업으로 대한 하모니카협회 주최,
KBS 후원으로 전국하모니카 경연대회를 처음 가지게 되었고 심사위원으로 존 세바스찬을 모시고 합주단의 최영진선생, 외부 인사로 김희조 선생과 KBS음악과장이 함께 심사위원이 되어 남산에 있는 KBS 공개 홀에서 경연대회가 개최되었었다. 합주단의 여러분의 권유로 말미암아 나는 이 경연대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 결과 의외로 1등의 영예를 얻었다. 그때 연주한 곡목은 웨버 작곡의 ‘마탄의 사수’의 서곡을 간추려서 편곡한 전주곡이였는데 찬송가에 있는 ‘내 주여 뜻대로’로 시작 되어 서곡의 경쾌한 3/4박자의 왈츠부분을 거처서 ‘사냥꾼의 합창’으로 매듭짓는 곡이었다. KBS공개방송실에서 시상식이 있던 날 시상식에 이어3등, 2등,1등 차례로 연주를 해서 녹음한 것을 뒤에 방송으로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내 연주 차레를 기다리며 무대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 내 차례가 가까와 와서 하모니카를 최종 점검을 하는데 하모니카의 음 하나가 침이 들어간 탓으로 소리가 나질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하게 되었다. 그 때 옆에 있던 3등에 입상한 여고생이 자기 하모니카로 대신 불라고 내어 주었다. 하모니카는 입에 대는 악기여서 빌려주고 받는 악기가 아니였지만 곧 무대로 나가야 되는 위기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여학생의 호의를 받고 그의 하모니카를 들고 무대에 나가 연주를 한것이다. 이 여학생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게 또 한번 더 실수 한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상식때 대학 친구들이 여럿 참석 했다.
KBS 홀에서 나오자 나를 끌고 친구들은 신세계 백화점 지하실 맥주홀로 갔다. 한턱 내야 된다는 (지금 말로는 쏜다고 해야겠지만)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수 없는것은 당연지사였다. 우리가 홀 안에 들어 서는데 귀에 읶은 노래가 홀안에 백그라운드 음악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또 하나의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지?
KBS에서 연주했던 나의 노래가 막 방송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홀에서는 보통 레코드 음반을 틀어 놓는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날따라 KBS라디오를 마치 우리가 들어 오는것을 미리 기다렸다는듯이 KBS 라디오를 틀어 놓았던것이다. 친구들은 이 곡이 끝나기 전에 축배를 들어야 된다고 주문을 서둘렀던게 생각난다.
상금으로 받은 돈의 절반은 한턱 내느라고 써 버리고 그래도 절반의 상금은 남아있어서 청계천 전자상으로 가서 처음으로 중고품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하나 삿다. 그 당시 최고 하이텍 제품이였다. 일본제 내쇼날 가정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우리집 최초의 반도체 제품 재산 목록 1호가 되었다. 우리집이 있는 답십리 종점 논길을 걸으면서 기독교 방송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이 라디오로 들을수 있는게 너무도 신기했고 그때의 감격 때문인지 몰라도 1년뒤 졸업하고 취직 한곳이 바로 금성사(지금의 LG)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설계실이 되었다.
하모니카 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으면 하모니카협회나 한국의 하모니카 음악계를 위해 봉사를 했어야 했는데 그 뒤 연수차 독일로 떠나면서 한국에서의 하모니카에 관계되는 일에 봉사할수 없게 되고 말았다.
1962년 서독으로 기술훈련을 받기 위해 60명의 공대 출신 기술 훈련생이 비행기를 타고 서독으로 향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때 독일이 한국에 베푼 첫 기술원조에 의한 프로그램이었고 파독 광부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1년 전의 일이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하늘에서 내려본 한국의 산은 벌거벗은 산이요 꼬불꼬불한 신작로, 초가집들… 내려다보는 경치에도 가난하고 불쌍한 조국의 모습이 뚜렷 했었다. 김포비행장에서 동경까지는 한국 정부(경제 기획원)에서 전세 내어준 대한국민항공(KNA) 비행기 였다. 전세 비행기 이고 보니 기내 분위기가 특이했다. 기내 마이크로를 잡고 스튜어디스가 특별 노래자랑 순서를 진행했다. 친구들의 요청으로 나는 기내 방송 마이크를 잡고 또 하모니카를 불렀다. 비행기 속에서 하모니카 분 괴짜가 나 말고 또 있을까 알아보고 싶다. 그때 비행기 기내에서 하모니카를 불고나자 사회를 보던 스튜어디스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를 ‘오늘 여러분을 모시고 동경까지 가는 이 비행기는 아시다시피 프로펠러 비행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독일에서 훈련 마치고 오실때는 제트여객기로 모실수 있게 되길 바람니다’ 라고 인삿말 한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우리 일행은 동경에서 대한항공의 프로펠러 비행기에서 내려 독일정부에서 보내준 전세기로 바꾸어 탓는데 눈이 휘 둥그레 해 젔다. 그때의 인상으로는 엄청나게 큰 보잉707제트여객기였기 때문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보잉 707제트기였고 생전 처음 타보는 독일의 Lufthansa여객기 였다.
사진설명:
1961년 한국에 초청되어 오신 하모니카 솔로이스트 존 세바스찬과 반주자와 하모니카협회의 여러분. (자료출처:대한하모니카 협회 카페 http://cafe.daum.net/harmonica) 사진 안에 독사진은 미국내에서 사용 되었던 연주회 포스터 사진.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John Sebastian Sr.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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