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13, 2018

케와 푸에블로(Kewa Pueblo) (산토도밍고 푸에블로)

 케와 푸에블로(Kewa Pueblo)는 최근까지 산토 도밍고 푸에블로(Santo Domingo Pueblo) 렸던 인디언 푸에블로이다. 알버커키에서 약 40마일 북쪽에 있는 푸에블로이다. 탠트록스 내셔널 모뉴먼트 또는 코치티 호수로 가는 길 도중에 들릴 수도 있는 인디언 마을이다. 알버커키에서 간다면 I-25 로 30마일 산타페 방향으로 가다가 Exit259에서 나와 22번도로로 서북쪽으로 약 4마일 가서 88번 길로 바꾸어 1마일 서남쪽으로 가면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84일에 열리는 Feast Day 축제는 1,000여명의 주민이 참여하는 Corn Dance 축제로 인디언 춤을  보기위해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날이다. 인디언 원주민의 생활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한국이나 타주에서 여행 온 손님을 쉽게 안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찍는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 것은 조금  유감스러운 점이다
  Photo: Pueblo of Santo Domingo Mission Church

웹사이트: www.newmexico.org/native_america/pueblos/santa_domingo.php 

Tuesday, June 12, 2018

카샤카투웨 텐트록스 내셔널 모뉴먼트(Kasha-Katuwe Tent Rocks National Monument)



사진 1: 카샤 카투웨 탠트록스 내셔널 모뉴먼트 입구의 간판.

헤이메즈산(Jemez Mt.)밑에 있는 인디언의 티피 텐트 (Tepee Tent)같은 원뿔꼴의 암석으로 경관을 이룬곳인데 최근 2001년에 내셔널 모뉴먼트(국립기념물:National Monument)로 지정되었다. 알버커키와 산타페 사이의 중간쯤 되는곳에 있는 코치티(Cochiti) 인디언 푸에블로(Pueblo) 땅에 있다. 코치티 푸에블로 인디언은 이곳을 카샤-카투웨(Kasha-Katuwe)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White cliffs”, 하얀 절벽이란 의미를 가졌다. 절벽이 하얀것은 화산재로 만들어진 암석이기 때문인데 이곳의 지층이 만들어진것은 6백만 년 전에서7백만 년 전 사이에 걸쳐 여러 번 일어난 헤이메즈산의 화산폭발로 말미암은 것이다. 화산폭발 때 마다 엄청난 화산재가 주위를 덮었는데 이 화산재가 굳어져서 단단한 돌이 되어 약 1000피트 두께의 응회암(凝灰岩:tuff)층이 만들어졌다. 화산재와 함께 뿜어져 나온 것 중에는 단단한 돌멩이도 섞여 있었는데 이 돌멩이들이 이곳의 원뿔꼴 모양의 암석을 만드는데 요인이 된다.

사진 2: 회색 응회암의 Hoodoo.

화산재가 굳어져서 된 암석은 오랫 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비에 씻겨 내려가게 되었으나 화산재 속에 들어 있었던 단단한 돌은 비에 씻겨 내려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밑에 있는 응회암이 씻겨내려 가지 않게 막아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원뿔꼴 모양의 암석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질학적 용어로 이를 후두(Hoodoo)라고 부르는데 이곳 후두의 크기를 보면 30m(90ft)에 이르는 큰 것도 있고 1m 내외의 작은 것도 있다. 후두의 머리 되는 돌이 굴러떨어져 비를 막아주는 머릿돌을 잃어서 작아지고 있는 후두도 있다.
   
                         사진 3: 좁은 협곡으로 Trail 들어간다.

공원 안 주차장주변에는 주니퍼(Juniper) 나무로 덮여 있고 계곡에 가까이 갈수록 피뇬(Piñon)과 키가 큰 폰데로사(Ponderosa) 소나무가 많아진다. 주차장에서 시작하는 케이브 루프 트레일(Cave Loop Trail)은 약 1.2 마일 되는데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절벽에 움푹 파인 굴을 볼 수 있다. 이 트레일(Trail)의 동쪽 코너에서 시작되는 1.5마일 되는  케니언 트레일(Canyon Trail)  정말로 재미있는 코스가 된다. 이트레일은 아주 좁은 협곡으로 들어가는데 가장 좁은 곳은 양팔로 좌우 벽을 만질 수 있는 정도로 좁은 곳도 지난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시원한 바람이 깊은 계곡을 지나감을 느낄 수 있다. 좁은 계곡을 벗어나면 텐트 모양의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트레일은 점점 가팔라지면서 텐트 바위가 밀집된 곳을 지나게 된다.  

  
사진 4: 사이 좋은 부부 텐트바위(Tent Rock).

마지막 0.3 마일은 65m(200ft) 가량을 올라가는 다소 힘든 코스가 되지만 정상에 이르면 360도 전 방향이 한눈에 들어와서 만족스런 쾌감을 느껴 볼 수 있게 된다.  이곳에서 보는 텐트 록(Tent Rock) 모양의 지형은 미국 국내에서는 이곳 밖에 없고 외국에서 보려면 터키 (Turkey) 중부에 Cappadocia란 곳에 가야 볼 수 있다 하니 이 공원의 가치를  재 인식 하게 된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알버커키에서 가자면 I-25를 타고 북으로 역 30마일 가다가 Santo Domingo/Cochiti Lake로 나가는 Exit259로 나온 후 좌회전하여 22번 도로로 12.2마일을 가면 코치티(Cochiti) 저수지의 댐(dam) 밑을 지나게 되는데 22번 도로는 좌측으로 꺾어지게 된다만일 직선으로 가면 코치티 저수지 댐의 끝쪽 위로 올라가게 된다. 22번도로로 저수지 댐을 등지고 약 1.8 마일을 가면 FR266도로를 만나서 우회전하면 모뉴먼트 광고가 있는 입구가 나온다입구에서 공원까지 4.7마일이 된다

사진 5: 인디언 텐트같은 텐트바위(Tent Rock)들.

입장료는 차당 $5.00이며 개장시간은 Golden Age Passport 소지자는 무료다여름철에는 전 8시에서 오후 4시 사이에 입장이 가능하고 오후 5시까지 입장료를 냈던 출입구역을 어나야 한다. 
여름철에는 문횟수 증가로 인한 주차공간 부족으로 오전 9시부터 입장이 지연될 수 있다.  1 6일, 부활절 전 금요일, 부활절, 부활절 직후 월요일, 5월 3일, 7월 13~14일, 7월 25일, 11월 1일, 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설날에는 에블로 드 치티(Pueblo de Cochiti) 문화행사 리를 위해 문을 는다. 
방문 전에 미리 색을 해 정보를 는 것이 다. 

웹사이트: www.blm.gov/visit/kktr
(Monument: 505-331-6259, Field Office: 505-761-8700)

Saturday, June 2, 2018

빌리 그레이엄 목사: 그의 첫 한국 방문과 알버커키

세계적인 복음 선교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빌리 그래함’으로도 표기 했었다) 목사지난 2월 21일 99세로 소천하셨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전 세계의 기독교를 부흥시킨 위대한 인물이며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시작으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에게 기도와 조언을 해주는 영적 멘토 역할을 해왔었다.

그가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찾아간 나라가 185개국이나 되고 집회 횟수가 400회가 넘는다. 그가 집회를 인도하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1973년 서울 여의도 5.16 광장에서 열린 집회는 10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그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집회 기록을 세웠다.


필자는 그레이엄 목사가 한국의 기독교 부흥에 이바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던 과정에서 그의 첫 한국전도 여행이 우리가 사는 알버커키 도시와 묘하게 얽혀있는 점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놀라게 됐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한국의 첫 방문을 결심하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195210월 하순 무렵이라고 빌리 그레이엄 센터에서 발행한 1952한국 크리스마스 방문일정표에 명시되어 있다.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일선 장병과 함께하며 장병들을 위문하며 전도 집회를 열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미 국방성에 제출해 놓고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개신교 목사님들을 대표해서 한경직 목사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에게 한국에 와서 전도 집회에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고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선교사들도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하고 있어서 한국방문을 결심하게 된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한국 방문 직전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전도 집회를 하고 있던 곳은 다른 곳이 아닌 알버커키였다.

알버커키 전도 집회는 112일부터 시작하여 4주 동안 했는데 마치 빌리 그레이엄 목사에게는 그가 한국에 갈 준비를 하는 집회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사를 1128일 자 알버커키 저널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날의 기사를 보면 집회의 마지막 날이 되는 1130일 오후 집회에서 한국을 위한 특별 헌금을 받겠다는 예고를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날 받아진 특별 자선헌금은 한국에 직접 가지고 가서 전쟁으로 고생하는 한국인을 위해 쓰이도록 전달해 줄 것이며 쓰인 내용을 알버커키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기사가 나 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보면 안디옥 교회 성도가 어려운 환경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보냈다는 기록과 유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알버커키에서 1952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하게 된 것은 55명의 지역 목회자들이 연합해서 뜻을 모아 초청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러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모시고 집회를 하는 데에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 인구 10만 명밖에 안 되는 알버커키 도시에는 집회를 열었을 때 참석이 예상되는 수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만한 대형 건물이 없었다. 지금의 농구 경기장, 15천여 명의 수용가능한  UNM Pit은 말할 것도 없고 UNM죤슨 짐 체육관도 지어지기 전이였다. 집회 준비위원이 고심하던 문제의 해결은 그 당시 알버커키 유지 중 하나인 샌더슨 가족과 만남으로 해결됐다. 샌더슨씨는 롤러 스케이트 경기장을 지을 계획으로 건축자재를 산마테오-센트랄가 근처 부지에 잔뜩 쌓아놓고 있었으나 건축 허가가 나오질 않아서 고심하던 중이었는데 집회 준비위원이 샌더슨 가족을 설득하기를 설계 변경해서 집회를 위한 55천 제곱피트 건평의 건물을 짓자고 했다. 합의가 이루어져서 알버커키 전도 십자군 성막’(Evangelistic Crusade Tabernacle)이란 이름의 건물을 초 급행으로 건축할 수 있게 되어 집회 장소 문제가 해결됐다. 1952 112일부터 4주간에 걸쳐 알버커키 전도 집회가 열렸다. 마지막 주에 이르러 집회는 절정에 이르러 추수감사절인 목요일에는 7천 명, 마지막 날인 1130일 주일은 8천 명이 넘어 좌석이 모자라 조금이라도 빈 공간이 있는 곳에는 임시 의자를 꽉꽉 채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4주기간 집회의 총 참가인원 12 3906명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결신자가 무려 3666명에 이르렀다. 마지막 주일날에는 한국을 위한 특별헌금을 했고 2주 뒤에 한국에 도착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전쟁고아와 모자원을 포함하는 어려운 전쟁 피해자를 위해 기금을 전달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고아가 10만 명, 남편 잃은 전쟁미망인이 20만 명에 이른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비극적인 사실이다.
미국의 여러 도시 중에 하필이면 알버커키가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통해 자선금을 보내는 도시가 되었을까?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숨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한국에서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했던 2000명의 한인 목회자 중에서 대표되는 분은 또 한경직 목사였다. 알버커키에서 폐결핵으로 2년간 고투하던 중 치유의 은사를 입고 귀국한 1930년 초기의 신학생이었던 한경직 목사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한 것이다. 이렇게 알버커키 도시는 묘하게도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한경직 목사 두 사람을 택해서 쓰면서 연결 고리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것 같다.

 한국방문 계획은 세워 놓고 알버커키에서 집회를 하는 동안에도 국방성에 제출한 한국방문 청원서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서 한국에 있는 일선 장병을 방문할 수 있는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집회가 끝나자 한국행 허락은 나오지 않았지만 한국을 향해 첫 발길을 내디덨다. 알버커키에서 LA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이다. 로스 앤젤러스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도착했을 때 국방성 허가가 나온 사실을 알게 된다. 122일이다. 어찌 보면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도중에 국방성에서 허가가 나온 것도 같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향해 행군할 때 요단강이 길을 막고 있었지만, 법궤를 메고 강물에 발을 넣자마자 강물이 끊어진 기적을 보는듯한 얘기다. 빌리 그레엄 목사는LA에서 125일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른다. 이때 한국으로 같이 가는 동역자 몇 분과 합류하는데 그중 한분이 한경직 목사와 함께 월드비전을 창립한 밥 피어스 목사다. 호노룰루에서 그 주일에 나갈 라디오 방송  “Hour of Decision” 프로그램을 마치고 127일 일본 동경행 비행기에 올라탄다. 동경에서 현지에 와 있는 750명의 선교사를 만나고 한국전 부상병들이 치료받고 있는 육군병원, 극동 사령부 담당 군인들과 군목을 만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낸다. 12 14일 라디오 방송  “Hour of Decision” 프로그램 녹음을 마치고 동경을 떠나 드디어 한국땅 부산에 도착했다.

그 당시 한국은 전쟁이 난 지 3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고 부산은 피난민으로 차 있었다. 도착 첫날은 그곳에 있는 미군 장병을 위한 예배를 인도했고 이튿날은 비다 모자원을 방문하고 나서 한국인을 위한 집회에서 설교했다. 한경직 목사가 통역을 맡았다. 대구로 이동하기 전까지 여러 번 집회를 갖고 또 군인병원, 어린이 병원 등을 방문했다. 1217일은 야외집회를 열었는데 함태영 부통령도 참석했었다고 한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6000명의 인파가 모였는데 길바닥에 멍석을 깔고 앉기도 하고 서서 말씀을 듣기도 했다. 군중 중에는 미군 병사도 여러 곳에 섞여 있엇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결신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할 때 한국 사람 속에는 미국 병사들도 썩여서 나왔다고 한다. 특히 한국인 사이에 썩여서 흑인 병사와 백인 병사가 나란히 걸어 나오는 모습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에게 더 없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1219일 대구에 하루 들려서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고아원과 병원을 방문했고 저녁에는 전도 집회를 가졌다.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길을 수마일 피어스 목사와 함께 걸어서 찾아간 고아원에서 눈먼 아이들 중에 한 아이가 일어서서 하나님 사랑이란 찬송가를 불러 주었는데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서울로 이동하여 1220일부터 25일 사이는 가장 바쁜 일정을 보냈다. 8군 사령관 밴프리트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고 군용 헬리콥터를 타고 서부 전선, 중부 전선 그리고 동부 전선에 있는 부대 장병을 위한 집회를 찾아갔고 영락교회에서도 집회를 했다. ‘난방 시설이 전혀 안 된 베다니교회(영락교회의 당시 이름)는 아이스박스와 같이 추웠는데 1400명이 본당을 채웠다고 영문 신문기사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인천에 정박해 있는 덴마크 병원선에 가서 죽음 직전에 있는 장병을 찾아가서 기도하는 시간도 보냈다.



일선에서 장병들에게 복음과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전하는 집회는 천막도 없고 의자고 없는 눈 덮인 언덕에 군인들은 추운 겨울 서서 말씀을 듣는 그런 야외집회였다. 그의 겨울 방문 기간을 통틀어 장병 7천 명이 집회에 모였고 1000명의 장병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했다. 빌리그레이엄 목사는 1225일 크리스마스 식사를 장병들과 함께 하고 두 차례의 메시지를 전한 후 한국을 떠났다. 한국방문을 마치고 난 후의 소감을 너무나 많은 비참한 전쟁의 상처를 대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30여 년 동안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며칠 동안의 한국방문 기간에 흘린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 이어서 자신이 어린아이로 한국에 왔다가 성인이 되어 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전쟁의 아픔과 슬픔을 더 알게 되었고 한국에서의 집회 경험이 자신을 더 성숙한 목사로 키워주었다고 한국방문을 회상했다.


알버커키 프레스비테리언 요양원에서 치료받고 한국에 간 유학생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 설교 통역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이곳의 요양원에서는 직원이나 환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은 알버커키 프레스비테리언 병원 100년사를 저술한 Mo Palmer 여사를 통해서 입수한 1953 3월에 발행한 요양원 소식지 Sanatorium Quarterly에 실린 토막 기사에서 볼 수 있었다.
그 기사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기사 제목우리의 한경직과 빌리 그레이엄
(Our Kyung Chik Han and Billy Graham)

장로 교인의 생활(Presbyterian Life)이란 잡지의 최근호에 발표된 기사에 의하면 우리 요양원에서 치료받고 퇴원한 신학생 한경직(그가 여기 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분이 한국에 가서 (목사님이 되셨는데) 한국 집회를 인도하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을 맡아 하셨다고 합니다. 두 분 모두에게 이번 집회는 분명 감격스러운 체험되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2차 한국 방문은 20년 뒤인 1973 5월이다. 이 집회는 한경직 목사가 대회장이 되고 17개 교단이 연합해서 준비한 집회였는데 50만 명의 인원이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했으나 집회 3일째 날은 110만 명이 모여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집회 중 가장 많은 인파를 모았던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이 집회에서 설교하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 실황은 알버커키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중계했다. 한밤중 UNM근처에서 운전하던 중 자동차 라디오를 틀자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설교하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쨍쨍한 말씀이 나오고 영어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창하게 한국말 통역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었다. 이 먼 곳 알버커키 방송에서 여의도 집회 중계방송을 듣다니..... 감격하며 방송을 들은 기억이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통역했던 그때의 김장환 목사는 그날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번 그레이엄 목사 장례식에 초청되어 외국 목사를 대표해서 조사를 낭독했다.



우리 가족이 그레이엄 목사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1975UNM Pit농구경기장에서 열린 알버커키 두 번쩨 집회 때이다. 3일간 집회였는데 입장권은 며칠 사이에 매진되었다. 집회 시작하자 연단에 선 그레이엄 목사는 알버커키가 지난 20년 사이에 이렇게 커진 것을 보고 놀랬고 리오란초에 인텔이 들어서서 컴퓨터 칩이 여기서 나온다는 말을 듣고 또 한 번 더 놀랐다 라는 간단한 몇 마디를 하고는 곧장 말씀으로 들어간 것이 기억난다. 그다음에 1998년에 세 번째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방문도 Pit을 만원으로 채웠다. 이때의 집회는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과 함께 하는 집회였다. 3일간은 프랭클린 목사가 설교했고 주말의 2일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설교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종교계에 이바지한 공로가 큰 인물에게 주어지는,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알려진 템플턴 상을 1982년에 10번째 수상자로 수상했다. 10년 뒤인 1992년에는 20번째 수상자로 한국의 한경직 목사가 이 상을 받았다. 

오랫동안 병환으로 고생하시던 그레이엄 목사지난 2월 21일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자택에서 향년 9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시신은 루이지애나 주립 교도소의 수감자들이 만든 값싼 송판으로 만들어진 관에 누여 젔고 시신은 장례식 전 워싱턴 DC로 잠시 옮겨져 국회의사당 로턴다(원형 홀)에 이틀간 안치되어 일반 시민의 조문을 받았다.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 상하원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리스도의 대사였던 그레이엄 목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짓밟히고 슬픔에 잠긴 사람, 소외당하고 버려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말했다.     



일반의 조문을 마치고 시신은 31일 고인의 고향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으로 다시 옮겨 32 20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빌리 그레이엄 도서관 옆에 설치한 천막에서 장례식이 엄수됐다. 고인의 시신은 지난 2007년에 별세한 부인 고(故) 루스 그레이엄의 곁에 묻혔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평소에 말하길 자신이 언젠가 죽겠지만 나의 죽음이란 죽음이 아닌 나의 살고있는 주소 변경일 뿐이라고 했다. 돌아가신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한경직 목사가 같은 주소에 살게 됐으니 두 분 오랜만에 만나서 한국얘기와 알버커키 얘기를 서로 나누고 계시리라 믿는다.
광야의 소리 2018년 3-4월호에 발표한 글   http://voiceofnm.kumcabq.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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